6,25전쟁의 단계별 개관(槪觀)

"호국영령의 그 날을 되새기며"

 

 

. 6월은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 영령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는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 특히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 전쟁은 벌써 72주년이 되었다. 6·25전쟁이 어른들의 기억 속에서 조차 점점 잊혀져가고 어린학생들은 6.25 전쟁이 언제 일어났는지 모른다고 하니 안타깝다.

. 이제 우리는 지난 한국전쟁의 참상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6.25전쟁 바로 알리기 일환으로 신물 나도록 보았을 사진이지만 6.25를 상기하자는 의미에서 뉴스보도를 중심으로 북한의 남침준비와 휴전까지의 전과정을 단계별로 소개합니다,

 

<북한의 불법남침을 보도한 조선일보 기사>

 

불과 72년전, 대한민국이 멸망 직전까지 갔던 날

1950년 6월 28일 11시 30분

서울의 라디오방송은 모두 중단되고 다음과 같은
방송이 흘러나온다.

친애하는 동포들이여!

용감한 인민군대의 장병들이여!

친애하는 서울시민들이여!

. 금 6월 28일 11시 30분에 영웅적 인민군대는 우리 조국의 수도 서울시를 리승만괴뢰정권의 통치로부터 완전히 해방하였습니다.

. 우리 조국 수도의 해방에 대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정부를 대표하여 나는 전체 조선인민에게 축하를 드리며 우리 수도를 해방시킨 영웅적 인민군대 장병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 이와 동시에 나는 리승만 역도들의 파쇼적 압박으로부터 해방된 서울시민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 전체 조선인민들은 리승만 매국역도들이 일으킨 동족상쟁을 급히 종식시키고 조국과 인민을 행복스러운 평화적 건설사업에 들어갈 수 있게 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기울여 진공하는 영웅적 인민군대를 원조해 주어야겠습니다.

. 적의 후방에서 활약하는 남반부 인민들과 빨치산들은 적 후방을 교란시키며 유격전을 일층 맹렬히 전개하며 도처에서 인민폭동을 일으키며 미 제국주의자들이 리승만 매국역도들에 공급하는 무기와 군수품을 우리 국토에 들여놓지 말기 위하여 적극 투쟁할 것이며 진공하는 인민군대에 강력히 협조해야겠습니다.

. 해방된 서울시민들은 민주질서를 속히 수립하여 수도의 복구건설사업에 착수하며 반동에 의하여 해산되었던 자기의 정권기관인 인민위원회를 급히 복구하여 인민군대를 적극 원조해야겠습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공화국 수도 서울시 림시인민위원회 위원장에 공화국 내각 사법상 리승엽동지를 임명하겠습니다.

통일된 조선 인민 만세!

인민군대에 영광 있으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수상 김일성

 

<독립문엔 김일성과 스탈린의 사진이 걸렸다>

 

[점령후 서울시내 상황]

. 서울시내에 인민군이 들어왔고, 서울의 중심, 중앙청에는 인공기가 게양되고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가 걸렸으며 집집마다 인공기가 게양되었다.

. 독립문엔 김일성과 스탈린의 사진이 걸렸으며 광화문광장에는 김일성찬양 문구가 걸렸고, 심지어 길거리의 전차에까지 김일성찬양 문구가 붙었다.

. 모든 신문은 북한측이 발행하는 해방일보 외에는 모두 폐간되었으며 서울시민들은 매일같이 끌려나와 김일성, 스탈린을 찬양하는 대회에 나가야 했고 평상시처럼 등교한 중,고등학생들은 갑자기 인민군에 '자원입대' 처리 되었다.

 

<서울점령 시청앞 인공기를 달고 달리는 서울전차>

 

광복과 국토의 분단

.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을 맺게 되자, 한민족의 자주독립에 대한 새 역사의 꿈은 마침내 실현되는 듯하였다.

<조국의 광복에 환호하는 국민들(1945)>

. 그러나 종전과 함께 표면화하기 시작한 미·소간의 견해 차이는 한국문제에 예기치 않은 암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 이때 미국은 한반도에 38도선을 설정하여 그 이북지역은 소련군이, 그 이남지역은 미군이 진주하여 각각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 그러나 국토분단과 미·소의 상반된 점령정책으로 남북 간의 분쟁이 점차 심화되었다.

 

<평양에 입성하는 소련군>

 

<미군 남한진입 미24단 군정청>

 

남·북한 정부의 수립

<대한민국 정부수립 경축식 전경(1948)>

 

. 유엔의 통일정부수립 결의에 북한이 거부하자 남한 먼저 자유선거를 실시하여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 탄생하였다.

. 한편 소련은 한국 정부가 수립된 직후 1948년 9월 9일 평양에서 이른바 김일성 체제 하의 북한정권을 탄생시켰다.

<북한 공산정권수립>

 

. 결국 1948년 8월과 9월 한반도에는 두 개의 체제가 들어섰다. 하나는 남쪽의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었고, 다른 하나는 북쪽의 공산주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었다.

 

미·소의 한반도 정책과 남·북한 정세

. 1949년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으로 부터 병력과 무기등을 지원 받았으며 이 기회를 이용하여 무력 남침 계획을 세웠다.

. 종전 후 급속한 감군과 국방예산의 감축으로 지상병력이 부족하게 된 미국은 1949년 6월 남한에서 철수했다.

<미군 철수 반대 현수막을 들고 거리 행진을 하는 사람들>

 

. 더욱이 미국은 소련이나 북한이 전면적인 무력침공은 일으키지 못할 것으로 낙관하고 1950년 1월 일본열도를 미국의 전략적 방위선으로 하여 공산세력의 팽창을 저지한다는 태평양방위선 선언을 히였다.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한국제외. 이를 계기로 남침준비 박차>

 

. 스탈린은 무력 남침보다는 남한 내 빨치산의 무장봉기에 의해 공산화하려는 책략에 따라 북한은 1949년 9월에 남한 각처의 경찰서와 관공서, 군사령부에 대한 공격에 나서 제주 4.3사건과 여순 10.19사건 등으로 사회 혼란을 야기시켰다.

<여수,순천 10.19사건>

 

. 1950년 4월초. 비밀리에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에게 스탈린은 중국이 동의한다는 조건으로 북한의 선제 남침을 승인하였으며 개시일자를 6월 25일로 승인하였다.

. 미군의 참전 가능성을 가장 고심한 김일성과 스탈린은 미군이 한반도에 도착하기전 2개월 내에 재빨리 전쟁을 종결하기로 하였다.

 

6.25전쟁 제1단계

(1950. 6. 25. ~ 1950. 7. 4.)

<인민군의 남하 진로(1950년 6월 25일 ~ 28일)>

 

. 1950년 6월 25일 새벽4시 북한군은 38도선 전 전선에 걸쳐 남침을 개시하였다.

<군장병 모내기 지원>

 

. 한국군 전방 사단들은 마침 이 날이 일요일이라 장병들이 외출, 외박을 나갔거나 대민봉사로 모내기 지원을 나가는등 자리를 비우고 있었기 때문에 기습상황에 대처하기 어려웠다.

<시청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 북한군 전차>

 

. 결국 28일 새벽. 국군은 미아리 방어선까지 격파 당하고 3일 만에 서울을 상실하였으며 공산군의 남하를 지연시키기 위해 6월 28일 새벽 2시에 한강대교를 폭파했다.

<1950년 7월 3일 미 공군기가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한강철교를 폭격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다리는 이미 폭파된 한강 인도교>

 

. 당시 서울 시민 대부분이 정부의 서울 사수 방송을 믿고 피난을 가지 않은 상태였다. 이들은 9.28 수복 때까지 석 달 동안 끔찍한 공산 통치를 감내해야 했다.

. 정부는 임시로 대전으로 옮겼다가 전황이 불리해지자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옮겼다.

. 이 과정에서 점령초기 미처 피난하지 못한 많은 우익 인사들이 체포되거나 인민재판을 받아 처형되기도 하였다.

<서울 시내 도처에서 인민재판이 열렸고>

 

<처참하게 죽은 시신앞에서 유족은 통곡할 따름이었다>

 

. 이승만 대통령은 25일 오전 미국의 지원을 요청하였으며 트루먼 대통령은 즉시 유엔 안보리를 개최하여 북한의 남침을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38도선 이북으로 퇴각을 요구했고 이를 무시하자 27일에 UN군의 파병을 결의했다.

<맥아더 장군 UN군사령관 취임.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10군단 창설>

 

6.25전쟁 제2단계

(1950. 7. 5.~1950. 10. 18)

<같은 해 8월 북한군이 38도선을 돌파하여
낙동강까지 이르렀던 북한군의 남침기이다>

 

. 7월 초 유엔군을 지휘할 통합군 사령부가 설치되고, 맥아더가 유엔군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파병및 의료와 물자지원을 하는 등 총 60개국이 6·25전쟁에 참전했다.

<미군 오산전투>

. 그리하여 미군 제24사단 선두부대인 스미스부대가 도착하여 1950년 7월 4일 최초로 한국군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였다.

.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군이 유엔군사령관의 단일지휘 하에 움직일 수 있도록 7월 14일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대전 후퇴 화차 위에 타고 졸다가 터널에서
많은 목숨도 잃어가며 고향을 떠나온 피난민들>

 

. 한국군은 북한의 남침시 일시 후퇴하여 북한군을 남한 깊숙이 끌어들였다가 반격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 한강이 1차 방어선, 금강이 2차 방어선, 낙동강이 3차 방어선이었다.

<한반도의 95% 점령당하고 8월 초순 낙동강 방어선 구축>

 

. 북한군에 밀려 후퇴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8월 초에는 마침내 낙동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하기에 이르렀다.

.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한 미군은 북한군에 맹폭을 퍼부었으며, 지상에서는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군을 저지하였다.

. 북한군은 제공권을 상실한 상황에서 공세 한계점을 보이고 있을 무렵 낙동강선 방어에 성공한 유엔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다.

 

 

. 맥아더 UN군 사령관은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낙동강 방어선에서도 총반격작전을 전개한다는 계획안을 채택했다.

. 인천해안이 상륙작전지역으로 부적절하다는 미합동참모본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 계획안을 승인받았다.

 

<인천상륙작전 병력 집결경로>

. 일본과 부산에서 승선했던 상륙군 부대들은 서해안을 따라 인천을 향해 북상하기 시작했다.

. 맥아더가 이끄는 UN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다.

 

 

. 유엔군 상륙부대가 한반도 중부에서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며 낙동강전선의 유엔군이 대반격을 실시하였다. 상륙 작전 후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며 유엔군과 국군은 9월 28일 서울을 수복했다.

<중앙청 태극기계양. 9월 28일 수복>

 

. 유엔군은 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의 전선을 단숨에 절단하였으며, 이때 북한군은 괴멸적인 피해를 입은 채 북으로 퇴각하였으며 일부의 패잔병들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험준한 산악으로 잠입하여 무장공비가 되었다.

. 한국군이 38도선에 도달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즉시 38도선 북진명령을 하달하였다. 이 기회에 북한 정권을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50년 10월 1일 삼팔선돌파 기념으로 국군의 날로 지정>

 

. 그에 따라 10월 1일 강릉 방면의 국군 3사단이 최초로 38선을 돌파했고 뒤이어 유엔군도 38선을 넘었다.

<삼팔선돌파 북진중 국군만세를 외치는 북한주민들>

 

. 북진작전으로 북한군에 점령되었던 지역들은 모두 회복되었다. 북한군의 방어선을 돌파한 유엔군은 10월 19일 평양을 탈환하고 청천강선으로 진출하였다. 유엔군은 북한군의 저항이 거의 없는 상태가 지속되자 계속 북진하였다.

<평양탈환, 평양시민 국군 및 UN군 환영대회>

 

. 이 무렵 김일성은 전쟁지도부를 강계로 옮기고 최후까지 저항하고 있었다. 이제는 거꾸로 김일성이 멸망 위기에 몰렸다.

. 10월 1일 김일성은 다급히 스탈린과 마오쩌둥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 10월 24일 청천강을 확보한 유엔군은 혜산진과 청진을 점령한 상황에서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 대거 개입함으로써 전쟁의 양상은 다시 크게 바뀌었다.

<북한에 청진탈환을 보도한 조선일보 기사>

 

6.25전쟁 제3단계

(1950.10.19 ~ 1951.7.9)

<중공군의 대공세를 유엔군이 37도선까지 후퇴한 다음
재반격 작전으로 38도선을 회복하게 된 중공군 침공 및
유엔군 재반격기이다>

. 가장 먼저 1950년 10월 입북한 중공군은 평안북도 운산 일대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해 미처 대비하지 못한 유엔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 평양을 거쳐 초산까지 진격한 국군이 중공군의 포위공격을 받았고 압록강을 향해 진격하던 유엔군 역시 중공군에 악전고투해야 했다.

 

<6.25전쟁에 개입한 중공군의 인해전술>

 

<'중공 정규군 침입' 보도한 조선일보 50년 12월11일자>

 

<1951년 1월, 1·4후퇴 당시 대동강
철교위를 건너 남하하는 평양시민들>

 

. 일명 '크리스마스공세’였던 11월 24일 최종공세에 큰 손실을 입은 유엔군은 남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 함경남도 장진호까지 진출했던 미 해병 1사단은 영하 20~30도의 혹한속에서 10배나 많은 중공군의 포위 공격을 받았으나 성공적으로 철수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흥남철수작전이다.

<유엔군을 따라가기 위해 흥남부두로 몰려든 피난민.
1950년 12월 19일>

. 이미 남쪽의 원산 방면이 차단당했기 때문에 유엔군은 12월 23일까지 흥남에서 철수했다. 이때 자유를 찾는 북한 주민 10만 여명도 유엔군과 함께 탈출하였다.

. 조·중 연합군의 총공세로 38선을 돌파당하자 결국 유엔군은 1월 4일 서울을 포기하고 평택-삼척선까지 철수를 결정하였다.

<한강 얼음위를 건너는 1.4후퇴 서울 시민들>

 

. 유엔군은 우세한 화력으로 중공군 전력을 약화시키며 공세역량이 한계점에 다다른것을 파악하고 1951년 1월 25일 일제히 반격작전에 나섰다.

. 유엔군의 반격에 중공군은 많은 손실을 입으면서 퇴각하였다.

<국군이 서울을 재탈환한후 북진중, 독립문을 지나고 있다>

 

. 이 전투에서 유엔군이 작전의 주도권을 회복하여 3월 15일 서울을 탈환하고 여세를 몰아 3월말에 38선을 회복하였다. 이들은 춘계대공세를 펼쳤지만 유엔군의 화력에 압도당하여 많은 희생을 남긴 채 저지되었으며, 유엔군은 반격을 계속하여 6월 현상태의 휴전선 지역을 점령하였다.

<서부전선에서 체포된 중공군>

 

. 한편 이 무렵 중공군은 공격의 한계점이 노출되고, 미국 역시 내부적으로 정전 압박을 받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6.25전쟁 제4단계

(1951.7.10 ~ 1953.7.27)

<국군 38선 부근까지 공격>

 

. 유엔군과 조·중연합군은 1951년 6월 한반도 문제를 더 이상 군사적 해결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정치적 타협으로 마무리하기로 합의하고 1951년 7월 10일부터 개성에서 휴전회담에 들어갔다.

<휴전회담 초기 1951년 7월 회담장 부근>

 

. 회담과 작전의 양면에서 팽팽한 힘의 균형이 유지되는 가운데 길고도 지루한 교착상태가 2년 여간 지속되었다.

. 이때부터 전투는 국지전 상태에서 38선을 연한 주요 고지들의 점령을 반복하는 상태로 지속되었다.

.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의 사망이 발표되면서 휴전회담은 급진전되었다.

. 이승만은 북진통일의 기회가 무산된다고 하여 휴전에 반대하고 정전회담에서 한국군 대표를 철수시켰다.

. 그것은 단순한 휴전회담에 반대한 것이 아니고 북한군의 재침략을 막을 수 있는 그런 안전보장 조치가 없는 한 휴전회담은 있을 수 없다는 그런 이유다.

. 휴전협정 체결까지 양측은 38선상에서 백마고지 등 수 많은 고지쟁탈전을 수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인명과 비용손실을 내었다.

<미제2사단 철의 삼각지대, 피의 능선, 단상의 능선을
점령하며 38선으로 부터 10km 북쪽으로 밀어올렸다>

 

<한국군의 반격 시작을 알리는 1953년 7월 17일 경향신문기사>

 

. 한편 휴전회담의 가장 큰 쟁점은 남북간 경계선과 포로교환 문제였다. 경계선은 전쟁 전의 38선이 아니라 정전시의 군사 접촉선으로 합의되었다. 그러나 포로 교환의 문제는 쉽게 합의되지 않았다.

. 유엔군은 포로의 자유송환을, 공산군은 강제송환을 각각 주장함에 따라 협상은 오랫동안 교착상태에 접어들었다.

. 그동안 휴전을 반대해온 이승만 대통령은 6월 18일 반공포로 2만 6천명을 석방시킴으로써 한때 위기국면을 맞기도 하였다.

 

<태극기를 들고 수용소를 빠져나오는 반공포로들>

 

. 이 대통령은 휴전협정을 묵인하는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군사·경제원조, 그리고 한국군 증강 등의 약속을 받아 내, 한국의 안보 태세가 굳건해졌다.

.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미군 2개 사단이 최전방 휴전선에 배치되어 북한의 남침 공격 시 자동적으로 전투에 돌입하게 되었다.

<휴전협정에 서명하는 6.25 전쟁 당시 유엔군사령관 마크 클라크>

 

. 우여곡절 끝에 6.25 전쟁은 발발된지 3년 1개월만인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북한군, 중공군, 유엔군 측의 미군 대표가 휴전협정을 서명하면서 마무리되었다.

. 이때 한국정부는 휴전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여 대표를 참석시키지 않았다.

<휴전회담 진행과 더불어 38도선 부근에서
공방전을 전개했던 전선교착전기이다>

 

. 대한민국은 유엔의 도움을 받아 북한의 침략을 물리칠 수 있었다. 유엔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대한민국은 세계지도에서, 또 한민족의 역사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 대한민국 정부와 국군, 국민이 나라를 지키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숭고한 헌신을 하였기에 대한민국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부산 유엔군 묘지>

 

 

비 목 (碑 木)

작사 한명희 작곡 장일남

노래 소프라노 김신자

초연(硝煙)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初動) 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초연(硝煙)은 화약연기를 뜻함

※ 비목(碑木)은 6.25 전쟁 당시 전사한 군인들을 땅에
안장할 때 상황이 너무 급박하여 미처 비석을 세울 겨룰이
없어 주위의 나무를 잘라세운 나무 십자가 비석을 말한다

초동(初動)은 맨 처음에 사귄 친구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궁노루는 사향노루를 말하며 천연기념물 제216호 이다.

 

6. 25때 미군과 한국 아이들,

배고픈 아이들에게 초콜렛등 먹을걸 나눠주는 미군들.

72년전 나라위해 용감하게 싸우셨던 분들께

고마운 마음을 갖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