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설과 설날의 유래

 

동요 " 설 날 "

 

윤 극 영 작 사

윤 극 영 작 곡

 

 

설 연휴가 코앞이다.

무려 5일간의 황금휴가!

설날은 민족 최대 명절로 가족과 친척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아마 설날에 이 노래 한 번씩은 불러봤을 것이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들이고
새로 사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우리 언니 저고리 노랑 저고리
우리 동생 저고리 색동 저고리
아버지와 어머니 호사하시고
우리들의 절받기 좋아하셔요

우리집 뒤뜰에는 널을 놓고서
상 들이고 잣 까고 호두 까면서
언니하고 정답게 널을 뛰고
나는 나는 좋아요 참말 좋아요

무서웠던 아버지 순해지시고
우리 우리 내 동생 울지 않아요
이 집 저 집 윷놀이 널뛰는 소리
나는 나는 설날이 참말 좋아요

 

 

. '설날' 동요는 어릴 적 많이 듣고 불렀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곡이다. 요즘은 설 명절에 대해서 예전만은 못하지만 어릴 적에는 추억이 많았던 시기였다.

. 설은 어린이들에게는 추석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기대도 크고, 얻는 것도 많은 명절이었다.

. 알록달록 설빔에 일어나자마자 부모님께 세배 드리고, 차례를 모신 후에 일가친척 찾아다니며 세배하며 집집마다 조금씩은 다른 맛난 설 음식을 얻어먹고, 세뱃돈도 두둑이 챙기는 정말 배부르고 따뜻한 명절이었던 것이다.

. 설은 언제부터 쇠기 시작했을까?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와 신라에서 설맞이 행사를 했다고 기록이 되어있다.

.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는 한식, 단오, 추석과 함께 설을 4대 명절로 여길 정도로 장대한 행사를 개최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에 음력설을 없애고, 양력 1월 1일을 공식적인 양력설로 지정했다. 이후 1985년 음력설을 '민속의 날'로 지정해 공휴일로 정했다. 그러다 1989년 비로소 음력설을 '설'이라 명명하고, 3일간 공휴일로 정했다.

. 그렇다면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로 시작되는 설날 동요는 언제부터 불리게 됐을까? 이 동요는 1924년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 노래밖에 없던 이 땅의 아이들을 보며, '반달'이라는 노래로 유명한 작곡가 윤극영이 지은 동요다. 어둠의 시대 속에도 새 날의 희망을 염원하며 만들었고, 이 동요속에 나오는 까치는 길조(吉兆)의 상징으로 암흑속에 갇힌 대한민국을 해방시키는 존재로 나타내고있다.

 

 

 

'설날' 노래 가사속에 나오는 설에 얽힌 재미난 유래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 설날을 한문으로는 원단(元旦:으뜸되는 아침) 또는 원일(元日), 세수(歲首)라고도 하는데 모두 한해의 첫날이란 의미이고 조신하게 모든 행동을 조심하란 뜻에서 신일(愼日​)이라고도 한답니다.

. 우리 조상들은 한해의 첫날이 좋아야 일년내내 복이 들어오고 만사형통한다고 믿었으니 정월 초하룻날에는 벽사초복(辟邪招福: 간사함을 피하고 복을 부르는 것)의 자세로 근신함과 동시에 새해에 대한 각오를 다졌답니다.

. 설날의 유래에 대해선 여러가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첫번째는 새로 다가오는 한해가 낯설어서 '낯설다'의 '설'에 하루를 의미하는 '날'을 붙였다고 하며, 두번째로는 새로운 한해가 오면 나이를 어쩔수 없이 한살 더 먹게되므로 가는 세월이 서러워 '서럽다 섧다'란 뜻에서 '설'이라고 했답니다. 그런가 하면 한살 두살할 때의 나이를 세는 단위 '살'의 옛말이 '설'이므로 거기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 또한 설 전날을 대개 까치설이라고도 하고 작은설 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나 작은설은 경우에 따라 동지를 작은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설에는 떡국을 먹고 작은설에는 팥죽을 먹는다.' 라는 말도 동지를 두고 한 말이다. 옛 문헌에 동지를 작은설, 즉 아세(亞歲)라고 하며 팥죽을 먹고 한 살 더 먹었다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동지를 작은설로 여겼었다.

. 현행 국어사전에도 작은설은 설 전날이라고 풀이해 놓고 있다.

. 설날 노래 가사에 왜 하필 수많은 동물 중에 까치가 등장했을까?

. 추석이 '한가위'라고 불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큰 설은 '한설, 한첫날'로, 작은 설은 '아찬 설, 아치 설'로 불렸는데 세월이 흐르며 '작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아치'가 뜻을 상실하며 '아치'와 음이 비슷한 '까치'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 우리 조상들은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고 믿었다.

. 서양에 평화의 상징 비둘기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길조(吉兆)의 상징인 까치가 있다.

. 까치는 실제로 시각과 후각이 사람보다 뛰어나 주위의 냄새는 물론 사람의 냄새까지 기억한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에 낯선 사람이 나타나면 경계의 표시로 우는데, 우리 조상들은 먼 객지에 나간 자식과 같은 반가운 손님이 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들이고

새로 사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우리 언니 저고리 노랑 저고리

우리 동생 저고리 색동 저고리"

 

. 설날에 입으려고 준비한 새 옷을 '설빔' 또는 '세장(歲粧)'이라고 한다. 우리 고유의 설빔으로는 색동옷이 있었다. 조상들은 어린 시절 설이 되면 이 색동옷을 입었고 색동옷을 다른 말로 때때옷, 까치옷이라 부르기도 했다.

. 설빔을 준비하는 이유는 새 옷과 함께 좋은 일들이 함께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풍습이다. 옛날 남자아이들은 검정 복건에 밝은 색의 바지와 저고리, 여기에 오방색이나 색동을 넣은 두루마기를 입으면 최상의 치레였다고 한다.

. 여자아이들의 경우 노랑 저고리와 분홍 치마가 설빔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고운 옷감을 구하지 못하는 집에서는 돌띠’라고 하는 긴 홍색 또는 청색 옷고름을 달아 가슴 한 바퀴를 돌려 맸다. 설빔조차 못 할 정도로 형편이 좋지 않으면 버선이라도 마련했다고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 호사하시고

우리들의 절받기 좋아하셔요"

 

. 세배는 어른에게 하는 새해 첫인사입니다. 그런데 설날 전에도 하는 세배도 있다.

. 새해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보신각 타종을 흔히 '제야의 종소리'라고 한다. 여기서 제야는 제사를 지내는 밤이라는 뜻으로, 섣달그믐 밤을 말한다. 음력 섣달그믐 밤이면 조상들께는 한해가 끝났음을 알리는 제사를 지내고, 집안 어른들께는 한해를 보내며 감사 인사를 올린다. 이를 '묵은세배', '그믐세배' 라고 한다.

. 조선시대 사회상은 빈부차가 심하게 나타났다. 설이 되어도 제사상 차리기 어려운 집들도 적잖았다. 이런 집을 잘 사는 집안 자제가 묵은 세배의 명분으로 찾아가 절을 올리고 제사 차릴 만큼의 돈을 놓고 나오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 이 시대에도 지키고 장려할 만한 미풍양속이라 여겨진다.

. 이날의 풍속 가운데 "그믐날에 자면 눈썹이 센다"고 했다. 옛날 어른들께선 설 전날 밤인 섣달 그믐날에 자면 두 눈썹이 하얗게 된다며 잠을 못 자게 하셨다. 이런 것을 '수세(守歲)', '장등(長燈)' 또는 '해 지킴', '밤새우기'라고 했는데, 어른들은 결국 잠에 취해 자는 아이에게는 눈썹에 밀가루나 찹쌀가루, 흰 분 같은 걸 발라 놓은 뒤 하얗게 셌다고 놀리기도 했다.

. 민간에 전해지는 전설 중에 그믐날에 잠을 자면 영원히 자는 것과 같다, 즉 죽음을 뜻한다는 것이 있었습니다.그래서 밤을 새우고, 새롭게 시작하는 날과 그 전날을 연결하기 위해서는 깨어 있어야 한다고 했던 겁니다.

. 또 집안 곳곳에 밤새도록 불을 켜둬 복이 집을 찾아 들어오게 하고, 잡귀를 쫓는다고 믿었습니다.

. 섣달그믐에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일이 또 하나 있다. 밤새 야광귀신 또는 양괭이라는 신발 훔치는 귀신이 찾아와 혹시나 내 신발을 훔쳐 가지 않는지 감시해야 한다. 양괭이는 아이처럼 자그마한 맨발 귀신이다. 섣달그믐 밤에 나타나 사람들 신발을 신어보다 제 발에 맞는 신을 찾으면 신고 달아난다.

. 이때 신발을 잃은 주인은 병을 앓거나 재수가 없다고 한다. 양괭이는 체구가 자그마해 어린 아이들의 신발이 꼭 맞을 수 있으니 특히 아이들 신발을 꼭꼭 잘 숨겨 놓아야 한다. 양괭이가 신발을 훔쳐가지 못하게 정신을 쏙 빼놓는 방법도 있다. 양괭이는 숫자 세기를 좋아하는데, 정작 셈에 약하다.

. 이날 문 앞에 말총으로 만들어 체를 걸어두면 양괭이가 촘촘한 체 구멍을 세다 새벽 닭이 울 때까지 미처 다 못 세고 가버린다. 아이들은 무서움을 느끼겠지만 재미난 풍속이 아닐 수 없다.

 

 

"우리집 뒤뜰에는 널을 놓고서

상 들이고 잣 까고 호두 까면서

언니하고 정답게 널을 뛰고

나는 나는 좋아요 참말 좋아요"

 

:: 널뛰기 ::

. 널뛰기는 긴 널빤지 가운데를 괴어 중심을 잡고 양쪽 끝에 한 사람씩 올라서서 번갈아 구르며 공중으로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는 것인데, 놀이터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시소와 같은 원리다.

. 널뛰기는 주로 여성들이 즐겨 했던 놀이로 도구가 간단하기 때문에 좁은 공간에서도 쉽게 할 수 있었다.

. 속설에 의하면 감옥에 갇힌 남편을 보기 위해서 여성들이 담 밖에서 널뛰기를 하며 감옥 안을 보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집안에 하루 종일 갇혀 있다시피 하는 여성들이 널뛰기를 통하여 담 밖의 세상을 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무서웠던 아버지 순해지시고

우리 우리 내 동생 울지 않아요

이 집 저 집 윷놀이 널뛰는 소리

나는 나는 설날이 참말 좋아요"

 

:: 윷놀이 ::

. 설날의 대표적인 민속놀이인 윷놀이의 기원은 정확하지 않지만, 풍년을 기원하는 소망을 담은 놀이라고 전해진다.

. 윷판은 땅을, 말은 사람을 상징하고, 윷을 던져 나온 패에 따라 움직이는것은 계절의 변화를 뜻한다. 그래서 옛날 어른들은 윷으로 새해의 길흉을 점치기도 했답니다.

. 윷놀이는 말 그대로 윷을 가지고 한 번에 던져 엎어지고 젖혀진 모양에 따라 윷판을 돌아 들어오는 놀이인데,

한 개가 젖혀지면 도로 도는 돼지를 뜻하고.
두 개가 젖혀지면 개로
개는 개,
세 개가 젖혀지면 걸로
걸은 양,
네 개가 젖혀지면 윷으로
윷은 소,
그리고 모두 엎어질 경우엔 모로
모는 말을 의미 한다.

. 가축의 크기와 빠르기에 따라 윷패의 움직임 수가 결정 되는 것이라고 한다.

 

 

. 또 하나, 설날의 대표적인 민속놀이인 연날리기가 있다. 연날리기는 오래 전부터 전승 되어온 놀이 중 하나로 설날부터 정월 대보름까지 이어졌다.

. 설에는 연을 날리기 전에 연 위에 소원이나 나쁜 것들을 써서 날렸다고 한다. 그러면 소원은 이뤄지고 나쁜 것들은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가 버릴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 또한 연은 보름이 지나면 날리지 않기 때문에 대보름 때에 액연을 띄운다고 하여 연 안에 액(厄)을 쓰기도 하고 송액이나 송액영복이라고 써서 연을 멀리 날려 보내기도 했다.

. 그 외에도 팽이치기, 바람개비놀이, 쥐불놀이, 복조리 달기등이 있고, 예전에는 마을사람들이 함께 모여 지신밟기, 차전놀이, 고싸움놀이 등을 해왔다고 하는데 이러한 집단놀이는 각 개인과 가정, 마을 공동체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놀이들이라 한다.

 

 

. 마지막으로 설날 하면 떡국이 빠질 수 없다. 썰기 전의 긴 떡가래는 장수를 의미하고, '엽전' 과 닮도록 둥글게 썰어 놓은 떡국 떡의 모양은 올 한 해 많은 재물이 들어왔으면 하는 바람을 담고 있어요. 또, 떡국 떡의 흰색은 새로운 상태에서 출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 또한 우리 속담 가운데 '꿩 대신 닭' 이란 말이있다. '꿩 대신 닭' 이라는 말은 떡국에서 나왔다고한다.

. 조선 후기의 세시풍습을 그린 '동국세시기' 에는 떡국 만드는 법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는데, 그중에 “떡국에는 원래 흰 떡과 쇠고기, 꿩고기를 사용했으나, 꿩을 구하기 힘들면 닭을 대신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라는 말이 등장한다.

. 여기서 나온 속담이 바로 '꿩 대신 닭' 이라고 한다.

 

윤극영 (1903∼1988. 동요작가,작곡가)

 

 

. 1903년 서울 종로구 소격동에서 출생한 동요작사·작곡자 윤극영은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요 작곡가로「설날」외에도「반달」「따오기」「고드름」등 후세에까지 널리 애창되고 있는 동요를 수없이 작곡하였다. 그는 음악을 전공한 음악도였으나 문학적인 기량이 풍부하여 그의 동요를 살펴보면 우리나라 어린이의 생활감각이나 시대적 상황에 의한 민족감정이 잘 나타나 있다.

. 음악학교 재학시절인 1922년 방정환(方定煥)·정순철(鄭順哲) 등과 함께 어린이문화재단인 색동회를 조직하고 동요를 작곡하면서 어린이운동을 전개하였다. 색동회의 회원인 그는 1924년 한국동요사에 빛나는 "반달"을 작곡하였다.

. 1924년부터 1926년 사이에 작곡된 17곡의 창작동요를 엮어 1926년에『반달』이라는 동요집을 엮어내고, 같은 해에 동요레코드도 출반하였다.

 

 

배경음악

<고향생각 - 산넘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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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동요 감상

 

< 고향생각 / 노래 선명회 >

 

저산넘어 새파란 하늘 아래는
그리운 내고향이 있으련마는
천리만리 먼땅에 떠난 이몸은
고향생각 그리워 눈물짓는다.

버들숲 언덕에 모여 앉아서
풀피리 불며놀던 그리운 동무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나
생각사록 내고향이 그립습니다.

 

. 이 노래는 어느 누가 생활고에 시달려 만주땅쯤 살면서 불렀던 노래 같다. 어릴적 타향에 있다고 생각하고 들어보면 슬프고 그리움이 샘솟는다.

 

 

< 설날 / 윤극영 작사. 작곡 >

 

< 고드름 / 유지영 작사. 윤극영 작곡 >

 

< 눈 / 박경종 작사. 박태현 작곡 >

 

< 눈길 / 윤석중 작사. 손대업 작곡 >

 

< 산 넘어 산 / 한용희 작곡 >

 

산 너머 산, 그 너머 또산, 찬 하늘 아래,

외로운 낮밤을 보내고 있는, 형아, 동생아,

설움을 참으며 귀를 기울여,

들어라 남풍에 실려가는, 우리의 노래를,

아아 봄이 온다네. 오라. 오라.

봄이 오는 곳으로, 봄이 오는 곳으로,

웃으며 오라.

 

* 마치 북한 김정은정권에 인권을 유린당하고 굶주리고 헐벗은
북한 동포들에게 보내는 노래같네요. 북한동포 여러분! 따뜻한
자유대한민국 품으로 "어서 어서 오라고" 자유대한민국은 여러분
들을 따뜻하게 맞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들과 즐겁고 행복한 설
보내시길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