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

 

봄날은 간다

 

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

백설희 노래

 

 

다음의 글은 시인 이일영 칼럼 "예술혼을 위하여" 에서 상당 부문 무단 발췌하여 게제하였음을 밝히며 저작권 문제 제기시 즉시 삭제 하겠습니다.

 

. 6.25 전쟁이 휴전으로 멈춘 슬프고도 암울했던 시기. '봄날은 간다'는 아름다운 노랫말 속에 슬픔을 감춘 채로 탄생했다.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대중가요의 노랫말로 선정될만큼, 서정적이고 한이 서린 가사는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아련하게 적셔온다. 많은 후대 가수들에 의해 여러 차례 리메이크되기도 해서 더 잘 알려진 노래이다.

. '봄날은 간다' 가사를 쓴 손로원. 미술을 좋아했던 청년이 작사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40년대 말이었다고 한다.

. 어수선한 시국을 피해 조선 팔도를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시를 썼다.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한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방랑을 이해하면서도 늘 그리워 했다고 한다. 결국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 유언처럼 남긴 말은 '봄날은 간다'의 모티브가 되었는데.

. "로원이 장가드는 날 나도 연분홍 저고리와 치마를 장롱에서 꺼내서 입을거야. 내가 열아홉에 시집오면서 입었던 그 연분홍 저고리와 치마를..."

.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그리움을 가슴에 간직하며 살다가 1953년 전쟁 막바지에 '봄날은 간다'의 가사를 완성하게 된다.

. 슬프고 허탈한 감정을 체념하듯 풀어낸 '봄날은 간다'는 백설희의 꾸밈없는 노래로 더욱 빛이 났다. 이 노래가 품고있는 '역설'을 노래의 창법 또한 담담하게 흘려보내듯 표현해서 쥐어짜듯 기교를 넣어 부르는 것보다 오히려 더욱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 긴 세월이 흘러도 늘 우리 곁에 있던 노래처럼 가슴을 파고드는 노래이다.

. 연분홍 치마도, 새파란 풀잎도, 열아홉 시절도 세월따라 흘러갑니다. 우리는 그들을 슬픈 마음으로 떠나보내지만, 꽃이 피고 별이 뜨고 새가 다시 날 때를 기다립니다. 봄은 가지만 또 다시 봄은 오니까요.

 

 

 

'봄날은 간다' 창작 비화

 

. 주옥같은 노랫말을 남기고 봄날 지나 가듯 홀연히 사라져 간 불후의 작사가 손로원에 대한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 서울에서 태어나고 철원에서 자랐으며 1973.12.11일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나셨다는 것 뿐.

. 더 안타까운 것은 암울한 시절에 서정적이고 주옥같은 불후의 노랫말로 고단한 심금을 달래주었던 점을 생각하면 서정시인 손로원에 대한 아무것도 기록되거나 보존하지 못한 점은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 1991년 8월 30일 동아일보에 작사가 정두수(1937~2016)가 쓴 칼럼“가요 100년 그 노래 그 사연”에 손로원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 칼럼에서는

. 1945년, 화사한 봄날인데도 금강산의 계곡물은 차가웠다. 상복을 입은 손로원이 무릎을 꿇고 있는 어머니 묘소에도 무성한 나무 그늘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 연희전문 문과를 나온 부잣집 외아들 손로원은 조선 8도를 두루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시를 썼다. 2차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때라 어수선한 시국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 "저것이 마음 붙일 데가 없어 낭인처럼 싸돌아 다니는 거지, 지도 장가를 들고 자식을 낳게 되면 고향에 와 눌러앉게 되겠지…"

.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한 어머니는 아들의 방랑병을 이해하면서도 구름처럼 떠돌아 다니는 자식을 그리워하며 혼자서 눈물 짓곤 했다. 남편이 살아 있을때보다도 더 많은 농토를 일구며 농사를 짓던 그의 어머니는 결국 과로로 돌아가시게 됐다.

. "노원이 장가 드는 날 나도 연분홍 저고리와 치마를 장롱에서 꺼내 입을거야. 내가 열아홉살 때 시집오면서 입었던 그 연분홍 저고리와 치마를 …"

. 어머니가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간신히 남긴 이 말은 곧 유언이었다. 객상을 당한 불효자는 어머니 무덤 앞에서 지난 날을 사죄하며 통한의 눈물을 흘려야 했다.

. 금강산과 인접해 있던 그의 고향 철원은 휴전을 앞두고 격전이 벌어졌던 곳.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으로 전쟁 막바지인 53년 봄 손로원은 <봄날은 간다>를 작사했다. 젊은 시절의 어머니를 떠올리면서….

. 그후 1953년 11월 27일 부산 영주동 산동네 판잣집에서 불이나 겨울 강풍을 타고 영선 고개를 넘어 용두산 판자촌과 옛 부산역 일대를 태워버린 부산역 대화재가 다시 일어났다.

. 작사가 손로원은 당시 판잣집 단칸방에 고이 간직한 연분홍 치마저고리를 입고 찍었던 어머니의 사진을 잃었다. 불멸의 가요“봄날은 간다”가 탄생한 배경이다.

. 손로원은 참담한 겨울을 보내며 불효의 회한을 매만지면서 아득한 회억의 봄을 걸어오는 어머니를 떠올리며 영원한 국민의 노래 “봄날은 간다”를 썼다.

. 다음 해 1954년 봄이 저무는 어느 날 손로원은 대구의 오리엔트레코드사에 있었던 작곡가 박시춘에게“봄날은 간다”작사를 전하여 작곡이 완성되어 백설희가 부르면서 영원한 노래“봄날은 간다”가 탄생한 것이다.

 

 

. 이 노래는 2009년 계간「시인세계」에서 현역 시인 100명에게‘시인들이 좋아하는 대중가요 노랫말’을 조사해본 결과 여러 시인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1위에 오르기도 하였다.

. 노래 가사 중에 '옷고름 씹어가며' '앙가슴 두드리며'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와 같은 감성의 서정성은 그 어떤 시에 견주어도 너무나 아름답다.

. 또한 이 노래는 금사향, 이미자, 배호, 조용필, 나훈아, 주현미, 은방울자매, 하춘화, 문주란, 금과은 등 당대를 대표하는 가장 많은 가수가 리메이크한 곡으로 음원 사이트에 등록돼 있는 것만 헤아려봐도 50명 가까이 이 노래를 녹음했으며, 2001년에는 제목을 빌린 영화 <봄날은 간다>가 개봉되어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노래로 역사를 남긴 작사가 손로원"

손로원 [孫露源] <1911 ~ 1973>

 

 

. 대중가요에 담긴 우리의 역사를 헤아려 가면 보편적으로 우리나라 대중 가요사에서 작사가의 양대 산맥으로 반야월 (1917~ 2012)과 손로원을 평가한다.

. 이와 같은 반야월 작사가와 양대 산맥을 이룬 작사가 손로원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나라 대중 가요사에 남은 주옥같은 노랫말에 비하여 참담할 만큼 그 자료가 전해지지 않는다.

. 여러 자료를 종합하여 살펴보면 작사가 손로원에 대한 이야기는 그 내용이 명확하게 증명되지 않은 사뭇 다른 이야기들이 혼재한다.

. 그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는 작사가 손로원은 서울에서 태어나 철원에서 자랐다. 독학으로 문학을 공부하여 1930년대부터 작사 활동을 하였다고 언급하고 있지만, 확인되지 않는 내용이다.

. 그는 무대장치에 필요한 미술 작업과 공연포스터 작업에서 미술에 대한 재능을 드러내었으며 한국전쟁 당시 부산 피난시절에 초상화작가로도 활동한 여러 증언이 존재하지만, 실제 작품으로 남은 기록은 없다.

. 한편, 음악 전문 채널 엠넷의 자료에 따르면 손로원은 경주 손씨 (慶州 孫氏)로 6년제 고등보통학교 졸업으로 명시하고 있다, 이어 1932년 서양화가로 데뷔하였으며 1934년 시인으로 데뷔하였고 1943년 대중음악 작사가가 되었으며 1958년 영화평론가로도 활동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 이와 같은 기록 이외에도 손로원은 1930년대에 시인과 작사가로 활동하였으나 치욕적인 일제의 시대 상황에 절필하고 술과 벗하며 그림을 그리고 초상화가로 활동하며 방랑 생활을 거듭한 것으로 추정된다.

. 이와 같은 손로원은 1945년 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부산에서 조국 광복을 맞았다.

. 이와 같은 불멸의 작사가 손로원은 우리나라 대중 음악사에 가슴으로 불러온 주옥같은 노래들을 작사하였다. 3,000여곡에 이르는 노랫말 중에서 대표적인 노래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작사가 손로원은 1953년 적십자기를 게양하고 부산항에 정박한 미국에서 온 의료선을 보면서 샌프란시스코를 그려냈다.

“금문교 푸른 물에 찰랑대며 춤춘다”“불러라 샌프란시스코야! 태평양 로맨스야!”로 노래하며 장세정이 불렀다.

. 그후 세계 지도를 붙여 놓고 특별한 노랫말을 연이어 작사하였는데 1952년 '인도의 향불' 1953년 '페르시아 왕자' 1954년 작사한 “홍콩 아가씨”는 금사향이 노래하여 전국을 섭권해 버리고 말았다. 이어 백설희가 노래한“아메리카 차이나타운”과“사십 계단 층층대에 앉아 우는 나그네”로 시작되는“경상도 아가씨”이다. 이어“물방아 도는 내력”을 연이어 발표하였다.

. 그리고 가장 대표적인 노래 중 많은 일화를 남긴 노래로 1956년 손인호가 부른“비 내리는 호남선”이다,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

. 로 시작되는 '비나리는 호남선'은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유력한 야당 후보 신익희선생이 호남지방 유세를 위하여 전주로 가던 열차에서 뇌출혈로 갑자기 사망하였다.

. 당시 신익희 선생의 유해가 서울역에 도착하면서 시민과 청년들이“비 내리는 호남선”을 열창하면서 추모의 슬픔과 함께 민초의 열망을 담은 노래로 더욱 많이 불리우게 되었다.

. 불멸의 작사가 손로원은 1973년 12월 11일 부산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여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주옥과 같은 노랫말을 통하여 시대의 애환과 정신을 전한 그는 일생을 욕심이 없는 방랑의 예술가로 살다 갔다,

 

박시춘 [朴是春] <1913 ~ 1996>

 

 

. 박시춘, 본명 박순동(朴順東)은 1913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가 운영하던 기생을 양성하는 밀양권번(券番)에서 당대의 명창들의 판소리와 노랫가락속에서 자란 그는 소년시절에 이미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 전래민요를 채보하고 연구하는 과정에서 작곡의 수련을 쌓았다. 아버지의 병 치료를 위해 가산이 기울어 어려웠던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 몰래 순천에서 일하면서 영화·연극에 깊이 빠져들었다.

. 1931년 무렵 정규 음악교육을 받으려고 중앙음악학교에 입학했으나 중도에 그만두고 홍개명이 이끄는 아리랑가무극단에 입단했다. 홍개명은 그에게 '늘봄'을 뜻하는 박시춘이라고 예명을 지어주었다.

. 1935년 본격적인 작곡활동을 하던중 가수 지망생 강문수(남인수)를 만나 가수의 길로 접어들게 한후 오케레코드사의 전속으로 채용됐다.

. 그의 첫 인기곡은 1937년 김정구가 노래한 "항구의 선술집"이다. 오케사에서 남인수와 다시 만나 1937년 그를 위해 작곡한 "물방아 사랑"은 남인수의 히트곡이 됐고, 그 이후 27년간에 걸쳐 두 사람은 골든 콤비를 이루었다.

. 박시춘·남인수 콤비의 인기를 확정지은 것은 이부풍에게 작사를 의뢰해 작곡하여 1938년에 발매된 "애수의 소야곡"은 남인수를 가수의 제왕 자리에 올려놓은 작품이 되었다. 이후 남인수가 부른 "감격시대"(1939)와 김정구가 부른 "누님 나 장가보내주"·"비단장사 왕서방"(1939)등 모두 박시춘의 히트 작품이다.

. 세계 제2차대전이 절정에 이르렀던 1943년 그가 작곡한 친일가요 "아들의 혈서" 와 "결사대의 아내"등을 작곡한 친일행위로 국민에게 사죄한바있다.

. 30년간 가요작곡가로 활동하며 <꼬집힌 풋사랑> <애수의 소야곡> <비내리는 고모령> <신라의 달밤>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 수 많은 인기곡을 발표하여 대중가요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 1948년 8월 15일 남한정부의 수립후 1948년 서울 명동에 럭키레코드 녹음실을 개설하여 본격적인 작곡활동에 전념했다.

. 1950년 9·28수복 직후에는 육군 정훈국 문예중대 문관으로 종군하면서<승리의 용사> <전우야 잘 자라> <전선야곡> <임 계신 전선> 등 진중가요를 작곡하였다.

. 5·16 이후에는 한국연예협회 회장(1961)·예총부회장(1965)·예술윤리위원부위원장(1966)을 역임하였으며 "항구의 선술집" 등 3,000여 곡을 작곡하여 대중음악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가 인정되어 1982년 문화훈장 보관장을 받았다.

. 그는 심한 당뇨병과 수술불능의 녹내장에 시달리다 1996년 6월 30일 오후 지병으로 눈을 감았다.

 

 

배경음악

 

아래 개별곡을 들으실때는 배경음악 음원을 꺼주세요

 

 

봄날은 간다

작사 손로원 / 작곡 박시춘

노래 백설희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 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 금과 은

 


 

 

봄날은 간다 / 조용필

 


 

 

봄날은 간다 / 색소폰 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