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달픈 사랑과

그리움을 품은 고개 "박달재"

 

울고 넘는 박달재


작사
반야월

작곡 김교성

노래 박재홍


 

작곡배경

. '울고 넘는 박달재' 의 애달픈 전설을 들려주는 노래가 있다.

. 이 노래는 짧은 노래가락도 슬프지만 박달재 전설을 자세히 들어보면 깊은 애잔함을 느낄 수 있다.

. 눈물서린 박달재에 관한 전설을 찾으러 떠나보자.

. 대중에게 널리 사랑받는 가요 중 하나인 <울고 넘는 박달재>는 박달재에 남겨진 '박달 도령과 금봉 낭자'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 또는 징용으로 끌려가던 남편과 이별하던 여인들의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이라 하는데, 노래 속에 전해지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 반야월이 악극단 지방순회 공연 중 충주에서 제천으로 가는 길에 농부 내외인 듯한 남녀의 이별 장면을 목격하고 작사에 착수, 여기에 박달재에 관한 전설과 1944년 제천시 백운면 평동리의 마을 장정 13명이 징용으로 끌려가던 날, 동네 부인들이 정성껏 만든 도토리묵을 남편의 허리춤에 달아 주며 고갯마루 서낭당에서 이별했다는 사연을 듣고, 함께 각색하여 이 노랫말로 만들었다는 일화가 있다.

. 가사 첫머리에 등장하는 "천등산 박달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박달재가 천등산을 넘는 고개인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천등산은 충주시 경계에 있는 산으로, 이 산을 넘는 고개의 이름은 '다릿재'이다. 박달재는 제천시에 속한 '시랑산'을 넘는 고개이다.


< 지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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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월이 충주에서 제천으로 넘어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먼저 천둥산을 지나 박달재를 넘어갔던 기억이 남아 혼동한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울고 넘는 박달재>는 1948년 박재홍이 부른 트로트 곡으로 반야월[진방남]이 노랫말을 짓고 김교성이 곡을 붙인 것인데, 과거 KBS 가요 프로그램인 '가요무대' 에서 가장 많이 불린 노래로 선정되었다. 이 노래는 발표 당시 대히트하였고, 박재홍은 대스타가 되었으며 노래에 담긴 서민적인 정서가 공감을 얻어 이후로도 오랫동안 애창되고 있다.

. 제천시 국도변 박달재휴게소 입구에는 노래비가 박달도령과 금봉낭자의 동상과 함께 세워져 있다.


 

천둥산 박달재의 유래


< 박달재 전경 >

* 제천시 봉양읍과 백운면 사이에 걸쳐있는 박달재의 전경이다.
서낭당이 복원되고, 노래비가 박달도령과 금봉낭자의 동상과
함께 여러 시설이 세워져 있다.

 

. 박달재는 충북 제천시 봉양읍 원박리와 백운면 평동리 사이에 있는 고개로 원이름은 '천등산'과 '지등산'의 '영마루' 라는 뜻을 지닌 '이등령' 이었으나, 이 일대에 박달나무가 많이 자생하므로 '박달재'라고도 하고, 조선 중엽 경상도의 젊은 선비 '박달'과 이곳의 어여쁜 낭자 '금봉'의 애닯은 사랑의 전설이 회자 되면서 박달재로 불리우게 되었다.

. 박달재는 고갯길이 워낙 험하고 가파른데다 박달나무가 많이 우거져 있어 호랑이 같은 맹수들이 많았다. 또 여기다 고개를 넘어가는 행인들을 노리는 도둑들도 많아서 이 재를 넘어 시집을 간 새색시는 두번 다시 친정에 가기 어려웠다고 한다.

. 사정이 이렇고 보니 한번 이 고개를 넘어 시집을 간 새색시는 아무리 친정에 가고 싶어도 다시는 친정에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새색시가 눈물을 쏟으며 이 재를 넘었다고 하여 '울고 넘는 박달재' 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 조선시대 서울로 가는 관행길이 박달재를 거쳐갔고 몇해 전까지도 38번 국도가 이곳을 지났다. 그러나 이제는 재 아래로 길다란 터널이 뚫려, 박달재는 고개로서의 구실을 잃고 관광을 목적으로 하는 이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가 되었다.

 

박달재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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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중엽, 경상도의 젊은 선비 '박달'은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중 지금의 평동리의 어떤 농가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이집의 딸 '금봉'과 눈이 맞았다.

. 금봉의 청초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은 박달과 박달의 의젓함에 마음이 통한 금봉은 금세 친해졌다. 이튿날 떠나려던 박달은 며칠을 더 묵게 되었고 밤마다 두 사람은 사랑을 키워갔다.

. 그러다 과거시험을 보러 박달은 떠나게 되고, 과거급제 후 함께 살기로 굳게 약속하지만 박달은 낙방하고 만다. 박달은 금봉을 볼 면목이 없어 찾아가지 못한다.

. 한편, 박달의 장원급제를 빌던 금봉은 박달이 떠나간 고갯길을 바라보며 기다리다 상사병으로 한을 품은 채 죽는다.

. 장례 사흘 뒤, 평동리에 돌아온 박달은 금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땅을 치고 운다. 얼핏 고갯길을 쳐다보던 박달은 금봉이가 고갯마루를 향해 너울너울 춤을 추며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쫓아간다.

. 그러나 고갯마루에서 금봉을 와락 끌어안은 박달은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만다. 금봉의 환상을 껴안은 것이다.

. 이일이 있은 후부터 사람들은 박달이 죽은 고개를 '박달재'라 불렀다.

 

김교성 [金敎聲] <1901 ~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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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성은 1901년 한성부에서 광산업을 하던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가톨릭 교회를 통하여 합창단과 성극을 접하면서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중동학교에 다니던 학창 시절에 독학으로 색소폰과 클라리넷을 연주하기 시작했으며 편곡에도 재능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 정식으로 작곡가로 데뷔한 것은 1932년에 빅타레코드에서 강석연이 부른〈영객〉〈서울행진곡〉을 발표하면서 부터이다.

. 1936년 신민요풍의〈능수버들〉을 왕수복의 노래로 발표, 대성공하였다. 1930년대 후반 이후 신인가수선발대회의 심사위원으로 활약하면서, 진방남, 백난아, 박재홍, 박경원등을 발굴하였다.

. 최고의 히트작은 일제 강점기 말기에 백난아가 부른〈찔레꽃〉이다. 고향을 그리는 가사 내용은 매우 애틋하지만 곡조와 창법이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곡으로, "한국인이 언제 어디서나 가장 즐겨 부르는 민족의 노래"라는 평이 있을 만큼 오래 사랑받았다.

. 대표작품으로는〈능수버들〉외에 진방남이 부른〈넋두리 20년〉〈사막의 애상〉백난아가 부른〈찔레꽃〉〈직녀성〉〈아리랑낭랑〉박재홍이 부른〈자명고사랑〉〈울고 넘는 박달재〉등이 있다.

 

진방남 [반야월 : 半夜月] <1917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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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방남은 1917년에 경상남도 마산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박창오이다. 1939년 김천에서 열린 전국신인 남녀콩쿠르대회에 출전해 1등에 입상하고 태평레코드사에 입사하면서 가수의 길을 걸었다.

. 1940년 백년설·신카나리아와 함께 녹음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처음 녹음한 곡은 "불효자는 웁니다" "그네줄 상처" "잘 있거라 항구야" 등 이었다. 그 중에서 "불효자는 웁니다"의 반응은 대단해서 레코드가 발매되기 2개월 전인데도 주문이 쇄도했으며, 이 곡은 발매되자 폭발적 히트를 기록하였다.

. "불효자는 웁니다"를 녹음하기 직전 모친 사망의 전보를 받았기 때문에 거의 울음을 터뜨릴 정도의 심정으로 절창으로 취입했다고 한다.

. 그 후 1942년 이재호 작곡의 "꽃마차"를 작사한 그는 자신이 직접 노래까지 불러 인기곡을 만들었다. 이때 반달의 뜻의 반야월을 예명으로 삼아 작사가로 데뷔했다.

. 해방 후 남대문악극단을 창설하고 작곡가 박시춘과 콤비를 이루며 "유정천리"(1959)등 숱한 히트곡을 쏟아냈다. 진방남이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겪은 일들이 노랫말의 모티브가 됐다.

. 6·25 전쟁 당시 미아리고개에 살았던 반야월은 단신으로 피난길에 올랐다가 9.28수복후에 돌아와 보니 서울을 탈출하지 못하고 남아있었던 부인은 영양실조로 누워있고, 4살 난 딸은 버티지 못하고 죽어간 이야기를 듣고 비통한 마음에 쓴 작품이 이해연의 "단장의 미아리 고개"(1956)이다.

. 피란 시절 마산국립결핵요양소 위문공연중 반야월은 객석 뒤편에서 소복 차림으로 흐느끼는 여인을 발견했다. 그녀로부터 '사랑의 상처로 얻은 마음의 병으로 요양 중'이라는 사연을 전해듣고 노랫말을 쓴 것이 권혜경의 "산장의 여인"(1957)이다.

.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노래를 작사하고 가장 많은 히트곡을 낸 작사가이면서 가장 많은 노래비를 보유한 작사가로도 알려져 있는 그는 추미림·고향초 등의 필명으로 "허생원"·"마도로스 박" 등 10여편의 극본을 쓴 극작가이기도 하다. 1991년 문화훈장 화관장을 받았다.

. 서울 미아리(단장의 미아리고개)와 충북 제천(울고넘는 박달재) 등 전국 10여 곳에 그의 노래비가 세워졌고, 고향 마산에서는 반야월 가요제도 열려 왔다.

. 특히 작곡가 박시춘, 가수 이난영과 더불어 '한국 가요계의 3대 보물'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대중의 사랑을 받은 노랫말을 많이 작사했다. 앞서 소개된곡 외에도 <산유화(1956)> <열아홉 순정(1957)> <무너진 사랑탑(1958)> <만리포 사랑(1958)> <외나무다리(1962)> <아빠의 청춘(1966)> <소양강처녀(1969)>등이 잘 알려진 곡이나, 작사한 노래만 수천 편이 넘는다.

. 2012년 3월 26일 노환으로 인하여 향년 96세로 타계하였다.

 

박재홍 [ 朴載弘 ] <1924 ~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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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일제강점기 경기도 시흥군에서 태어나 청년시절 은행원으로 잠시 근무하였다. 해방 직후인 1947년 당시 오케레코드가 주최한 신인콩쿨에서 입상하여 데뷔하였고, 1948년 <눈물의 오리정>을 옥두옥(1927~ )과 듀엣으로 취입하고, 이어서 반야월이 작사한 <울고 넘는 박달재>를 취입하였다.

. 1949년 서울레코드가 창설되자 전속하여 같은 해 <자명고 사랑>, <제물포 아가씨>, <마음의 사랑>을 취입하였다. 1950년에는 반야월이 '남대문악극단'을 창설하자 단원으로 활약하던 중 한 달 만에 6.25 전쟁이 터졌고, 그는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 거기에서 쇼무대에서 노래를 불렀고, 휴전이후에는 부산의 미도파레코드와 대구의 서라벌레코드에 전속으로 있으면서 <경상도 아가씨(1955)> <비 내리는 삼랑진>등을 취입하였다. 1954년 말에는 부산의 도미도레코드에 전속하여 <물방아 도는 내력> <향수> 등을 취입하였고, 1959년 당초 영화 주제가로 발표되었던 <유정천리>는 1960년 대통령선거 야당 후보였던 조병옥의 갑작스런 타계와 관련해 대중의 자발적인 추모 개사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 1940년대 인기 가수였던 백년설의 뒤를 이어 구수함과 포근함이 느껴지는 서민적 대중가요로 인기를 모았고, 담백하면서도 힘 있는 창법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던 중 1989년 3월 21일 오랜 지병으로 인하여 향년 66세로 타계하였다.

 

배경음악

 

아래 개별곡을 들으실때는 배경음악 음원을 꺼주세요

 

울고 넘는 박달재


작사
반야월 / 작곡 김교성

노래 박재홍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넘는 우리 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부엉이 우는 산골 나를 두고 가는 님아
돌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 가소
도토리 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
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

박달재 하늘고개 울고넘는 눈물고개
돌뿌리 걷어차며 돌아서는 이별길아
도라지 꽃이 피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금봉아 불러보나 산울림만 외롭구나

 

김연자 - 디스코 버전


 

김용임 - 울고 넘는 박달재


 

오동준 - 테너색소폰 연주

 

트럼펫 연주

 

淚の パクタル峠 / 大川榮策

(나미다노 박달도우게 / 오오가와에이샤쿠)

 


 

天登山 パクタル峠
涙で 越えたよ
あの娘可愛い  粃緞のチヨゴリ
恋にひとすじ 女のさだめ
せめて仲よく 暮らしておくれよ

天登山 パクタル峠
泣き泣き 越えたよ
山のカケスも あと追い鳴いた
風にヒラヒラ 蝶蝶のように
飛んでおゆきよ 恋しいあの人に

天登山 パクタル峠
流れる  雲よ
無事にあの娘を 屆けてほしい
今度いつまた あの娘に会える
いつも明るく 咲いてておくれよ

 

재미있는 역사이야기 '천둥산 박달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