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노래" 에 얽힌 사연


이별의 노래

 

작사 박목월

작곡 김성태

 

 

 

박목월의 '이별의 노래' 에 얽힌 사연

. 현재 70대 노장년층들이 고교시절 목청 높여 애창했던 노래가 묘하게도 시인 박목월과 관련된 '이별의 노래''떠나가는 배'라고 하여 관련된 에피소드 자료를 찾아 보았습니다.

. 시인 박목월이 사랑했던 아름다운 여대생과 제주도로 도피생활후 헤어짐의 아픔을 노래한 시가 '이별의 노래' 이고 그 여대생의 아버지가 백방으로 수소문을 한 끝에 제주까지 찾아와 마침네 딸을 설득시켜 데리고 가게 되는날, 목월과 가깝게 지내던 양중해 선생이 부두까지 동행하며 그 애절한 이별의 장면을 보고 쓴 시가 '떠나가는 배'라는 이야기는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연애사건의 피날레로 매우 그럴 듯하다.

. 두 노래가 다 유명한 가곡이므로 음악영화로 만들어도 근사할것 같은 이 이야기의 진실을 밝혀봅니다.

 

이별의 노래의 작곡 배경

. 전쟁의 세찬 회오리 속인 1952년 여름, 대구에 들렀던 김성태는 시인 박목월을 만나 곡을 써달라는 부탁과 함께 "이별의 노래"를 받아들었다.

. 시를 읽어 내려가던 김성태는 주옥 같이 아름다운 서정시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 "마음에 든 시는 낭송하는 사이 스스로 곡이 이루어진다"고 말한 김성태는 이 시를 읽으면서도 곡이 샘물처럼 고였다고 한다.

. 그날 밤 여관의 모기장 속에서 악상을 다듬어 곡을 완성하였다.

. 작곡가는 간혹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은 아니냐는 질문을 받기도 하였다는데, 전혀 사연은 없지만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라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뭉클해진다고... 선율이 곱고 서정성이 짙어 1950년대 이후 가장 많은 사람들에의 해 불려진 가곡이다.

. 전쟁통에 수많은 이별이 있었을 테니 이 노래도 당시 모든 이들의 가슴 속의 노래였을 것이다. 가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우리 서정가곡 "이별의 노래"를 감상하며 가을 속으로 깊이 빠져든다.

 

 

뮤지션 소개

[작사자 박목월(朴木月)(본명 박영종)]

(1916 ~ 1978)

 

. 경주에서 태어난 그는 본명 '영종'보다 '목월'로 그의 이름이 굳혀져 있다. 대구 계성중학 3학년때 열여섯나이로 잡지 신가정과 어린이에 동요 '통딱딱 통딱딱' 으로 당선되어 동요시인으로 이름을 내기 시작했으며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로 이땅의 아이들에게 동심을 키워주었다.

. 1949년에 그는 이화여중 교사로 부임하면서 서울에 정착하였고 그 후 한양대학 교수로 강단에 서면서 많은 시를 남겼다. 한국시인협회 회장, 시전문지 《심상(心像)》의 발행인 등으로 활동한 청록파 시인으로 1972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서훈 받았다.

. 1978년 3월 28일 이별의 노래를 남긴채, 그도 우리와 이별을 하고 말았다.

 

< 작곡가 김성태(金聖泰) 1910 ~ 2012>


 

. 1910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성태는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한 후에 '흥난파'에게서 바이얼린을 배웠는데 미국유학을 다녀와 현대음악을 가르치고 있던 '현제명'이 그가 바이올린도 잘한다는 소식을 듣고 음악과로 전공을 바꿔 음악공부를 하게 하였다.

. 1934년 24세때 연전 졸업과 동시에 체계적인 음악수업을 받기 위해 도쿄고등음악학교(현 일본국립음대) 작곡과에 유학, 일본에서 작곡을 전공한 최초의 국내 작곡가가 되었다.

. 1939년4월초 유학을 끝내고 귀국하여 전임 이흥렬씨의 뒤를 이어 경성 보육학교 음악주임이 되었고, 이후 1941년 보성전문학교 음악강사로 옮겨 해방때 까지 재직하다 1976년 서울 음대학장으로 정년 퇴직할때까지 재직하였다.

. 문화훈장 모란장(1962)과 국민훈장 동백장(1976)을 서훈 받았다. 그의 작품으로는 '동심초' '산유화' '봄이 오면' '한송이 흰백합화'등의 우리 가곡을 남겼다.

 

 

 

 

이별의 노래" 에 얽힌 이야기

 

다음의 글들은 이정식 교수(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전 CBS 사장)님의 5편으로된 "이별의 노래"를 요약한것임을 밝힙니다.

 

< 아픈 가슴 절절이 노래한 "이별의 노래" >

[ [목월의 제주행과 슬픈 이별 ]

. 한 유명 시인이 사랑했던 아름다운 여대생과의 헤어짐의 아픔을 노래한 시가 '이별의 노래'라는 이야기는 세간에 기정 사실로 알려져왔다. 이 연애 사건은 호사가들이 좋아할 만한 흥미진진한 러브 스토리이다.

. 신문, 잡지 등 워낙 여러 지면에서 이름있는 문인들이 '시인의 애틋한 사랑이 낳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시' 라며 박목월의 '이별의 노래'를 진지하게 설명해 놓았으므로 누구도 그 이야기를 의심치 않았다.

. 평전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평전(評傳): 개인의 일생에 대하여 평론을 곁들여 적은 전기.

. 박목월이 피난시절 대구에서 알게 된 H씨 자매가 있었다. 자매가 모두 목월의 시를 좋아해 목월을 자주 찾아왔다. 처음에는 흔히 있는 팬과의 만남 정도로 대했다. 그러는 사이 휴전(1953년 7월)이 성립되었다.

. 목월은 가족보다 먼저 서울로 올라왔다. 그사이 자매도 상경했다. 그러다 언니가 먼저 결혼을 하자 이번엔 동생이 혼자 목월을 찾았다. 동생의 가슴에 사랑의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목월도 그녀에게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 1954년 초봄부터, 두 사람이 서울의 밤거리를 함께 거니는 날이 많아졌다. 목월은 40을 바라보는 나이었다. 자책감으로 괴로웠다. 어느 날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있는 가까운 시인 Y를 불러 H양을 만나 자신을 단념하도록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

. Y씨를 만난 H양, Y씨의 말을 듣고 나서, "선생님,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죄가 아니겠지요. 저는 다만 박 선생님을 사랑할 뿐, 이 이상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었다.

. 그해 여름이 가고 가을 바람이 불어 왔을 때 목월은 서울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와 함께 제주도로 떠난 것이다. 두 사람은 제주에서 넉달쯤 동거를 했다.]

. 그런데 그 다음이 더 극적이다. 이 사건 이후 20년쯤 흐른 후 여류시인 K씨로부터 들은 이야기라면서 이렇게 옮겨 놓았다.

. 그 제주 생활이 넉 달째 접어든 겨울 어느날 부인 유익순이 제주에 나타났다. 목월과 H양이 살고 있는 집을 찾아온 그녀는 두 사람 앞에 보퉁이 하나와 봉투 하나를 내 놓았다.

. 보퉁이에는 목월과 H양이 입고 겨울을 지낼 수 있는 한복 한 벌씩이, 그리고 봉투에는 생활비에 보태 쓰라는 돈이 들어 있었다.

. 남편은 물론 H양에 대해서도 그녀는 전혀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고달픈 객지 생활을 위로했던 것이다. 그러한 그녀 앞에서 H양은, "사모님!" 하고 울었다. 목월도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 결국 목월은 가정으로 돌아왔다. 제주생활 넉 달을 치르면서 유익순 앞에서 울었던 H양은 목월을 단념하게 된 것이다. 널리 애창되고 있는 목월 작사의 '이별의 노래' 가사는 H양과의 이별의 심정을 읊은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 그런데 위의 이야기들은 과연 근거가 있는 것일까?

 

[ 목월의 제주 생활 ]

. 목월과 H양의 제주 생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단편적인 기록들이 있다. 시인은 낯선 제주에 내려와 우연히 알게 된 젊은 양중해 시인에게 "어디 어촌에 파묻혀서 몇 달 쉬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청년 양중해는 시인의 부탁대로 용두암 부근의 초가집을 마련해 준다.

. 시인은 당시 아리따운 소녀를 데리고 있었다. 시인은 초가를 마련해준 청년에게 소녀를 친구라고 소개했다. 이런 제주에서의 생활이 수개월 남짓 되었을까..... 시인과 함께 제주로 내려온 소녀를 찾기 위해 소녀의 부친은 백방으로 수소문을 한 끝에 제주까지 찾아왔고 마침네 시인과 소녀의 짧은 사랑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 H는 목월에게 꼭 선생님이라고 불러 선생님과 제자 사이 같았다. 그녀는 예쁘고 호리호리 했으며 자주 아파서 병원 출입이 잦았다. H양의 아버지가 목사란 얘기도 있는데, 주일이면 빠지지 않고 인근 교회에 나갔다.

. 소녀의 아버지가 딸을 설득시켜 데리고 가게 되는데, 박목월이 H양과 이별하던 날, 목월과 가깝게 지내던 양중해 선생이 부두까지 동행했다. 당시 양중해 선생이 그 애절한 이별의 장면을 보고 쓴 시가 '떠나가는 배'라는 이야기다.

.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연애사건의 피날레로 매우 그럴 듯하다. 특히 주인공이 유명시인이기 때문이다. 두 노래가 다 유명한 가곡이므로 음악영화로 만들어도 근사할것 같다.

. 사실 여부?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굳이 말한다면 가곡 '이별의 노래'는 김성태 작곡으로 이 사건 2-3년 전 부산에서 이미 발표된 노래이다. 제주의 로맨스는 1954년 가을에 시작해 유채꽃이 만발하던 1955년 초봄 사이의 일이다.

 

[ 해후(邂逅), 그리고 하직(下直) ]

. 목월은 세월이 한참 흐른 후 그 여인을 만났다. 어느 겨울날 그녀의 집을 방문한 것이다. 그녀는 결혼을 했고 어린 아들도 있었다. 목월은,"30년 가까운 세월의 저편 끝에서 찾아오는 한 사람의 나그네 같은 심정이엇다"고 한다.

. 내가 그녀를 방문한 것은 눈발이 내리는 날이었다. 백발이 되면 죽기 전에 한 번쯤 만나보고 이승을 하직하려니 하고 젊은 날에 마음 속으로 다짐하던 그녀를 찾아가게 된 것이다.

. 문이 열렷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막혔던 하나의 통로가 이제 열리는 것이다. 미소를 띤 그녀의 모습, 문득 나는 외면해 버렷다. 외면해 버렸다기보다 고개가 절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 그녀는 조용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여전히 미소를 띤 채. 그렇다. 나도 미소를 띠고 있엇다.

" 아드님도 벌써 많이 자랐겠지요?" (여기서 아드님은 박동규 서울대 교수)

"녜, 아직 장가는 들이지 않았습니다. 곧 장가를 보내야겠습니다. 댁의 아드님은?"

"아직 어린걸요."

"아버님께서는 여전히 교회 일만 돌보십니까?"

"아녜요, 아버님도 이제 많이 늙으셨는걸요."

. 나는 일어섰다. 이제 하직해야 할 때가 이르게 된 것이다. 이승을 떠나기 전에 꼭 한번 다시 만나 보려던 젊은 날의 결심을 이루게 된 오늘의 나의 발걸음은 무척 허전하고도 가벼웠다.

. 사랑하던 이들을 떠나보내고, 홀로 시(詩)속에서 이별의 슬픔을 노래하던 목월도 어느 날 그들처럼 저 하늘로 갔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했던 것처럼…….

. 목월은 1978년 3월 24일, 새벽 산책길에서 돌아온 후 고혈압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향년 63세엿다.

▶ 목월은 이 글에서 "30년 가까운 세월" 이란 박목월 식 셈법이다. 목월은 그녀와 헤어진 후 10년이 채 안되어 다시 만난 것이다. 세상의 시간과는 다른, 시인의 감성속 30년으로 해석해야 할 것 같다.

 

 

박목월이 털어놓은 <이별의 노래>의 주인공

. 목월은 '이별의 노래'가 여대생 H양과의 이별을 노래한 것이란 소문에 대해 듣고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의 책 '구름에 달 가듯이''이별의 노래'를 짓게 된 동기를 써 놓았는데 다소 추상적이다.

. "세상에서 널리 불려진 '이별의 노래'에서, 내가 노래한 상대가 누구냐 하는 질문은 어리석은 일이다. 자기 평생에 가장 소중한 이름 하나를 감출 줄 모르는, 헤프고 어리석은 바보도 없을 것이다."

. 라고 쓰면서 제주도 H양외에 두 여인이 더 소개되고 있다.

. 그중 한여인은 대구 여성으로 박 시인이 대구금융조합에서 근무할 때 알던 사람이며, 전쟁 중에 우연히 재회해 그 후 다시 만나기 시작했고, 병실에서 하룻밤을 간호하며 지낸 적도 있으며, 결국 세상을 떠났다.

. 그녀가 임종한 시기는 1952년 11월 초순께이다. 나머지 한 여성은 부산의 여인으로 목월은 6.25때 부산까지 피난을 갔었다. 1950년 혹은 1951년 경, 전쟁 초기였을 것이다. 이 부산에서 한 여인을 사랑하였다. 그의 고백이다.

. "그 쓰라린 생활 속에서도 나는 사람을 사랑했었다. 미소 짓던 그녀의 모습이 불현듯 바다 가득히 퍼졌다. 그녀는 항상 내 속에 살고 있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그녀와 함께 나는 호흡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 혹시 '이별의 노래'에서 읊은 여인이 바로 이 여인은 아닐까? 어쨌든 '빈 손바닥'이란 제목의 시는 이 여인을 떠올리며 지은 시가 분명하다. 일부 싯귀를 소개하면

"부산에는 보수동이라는 거리가 있었다.

(중략)

이 세상에서는 누구라고 그 이름을 밝힐 수 없는 한 여인과 나는

그 거리의 상반(상밥)집에 드나들며

상밥 (반찬과 함께 상에 차려서 한 상씩 따로 파는 밥).

아주머니와 친하게 지냈다.

세상에서는 그녀가 누구라고 이름을 밝힐 수 없다.."

이제 정리가 좀 되는것 같다.

'이별의 노래'에서 '떠나가는 배'로 이어지는 슬프고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는 누군가들이 상상력을 발휘해 만들어 낸 새로운 창작물임이 이제 거의 분명해진 것 같다.

 

 

< 배경음악 >

이별의 노래 / 로망 드 마루

 

이별의 노래 (1952)

작사 박목월

작곡 김성태

노래 수원시립합창단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서늘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 낮이 기울며는(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우리라
(울리라)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주 : 현재의 가사와는 세 군데에 차이가 있다. 현재의 가사는
1절의‘서늘’이‘싸늘’로, 2절의‘기울며는'이‘끝나면'으로,
3절의‘우리라'가‘울리라'로 바뀌어져 있다.